- 프롤로그 : 낯선 도시들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유들로 타지에 발을 들이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들을 마주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그 곳에서 함께하는 사람들보다도 먼저 그 도시, 그 동네와 먼저 친해지고픈 마음이 먼저 들 때가 많았다. 자주 들르게 될 편의점의 위치를 외우고, 제일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카페를 찾았다. 만약 산책을 한다면 어디를 다닐지 눈에 익혀놓거나 우체국이나 병원, 약국 등을 찾는 일도 빠진 적이 없었다.
도시와 내가 친해질 때 즈음엔, 나도 어느새 이 곳의 공기에 물들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도시의 일부가 되는 느낌이랄까. 얼마 전 본 다큐멘터리에서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공공재다”라는 말을 보았는데, 내가 경험한 서울도 정말 그런 곳처럼 느껴졌다. 누구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자원들을 함께 가꾸고 누리는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개인들은 익명성에 기대며, 스스로 작은 존재라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되는 곳인 것 같다.
'미지의 서울'은 그런 '도시'인 서울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했다. 도시가 제공하는 풍요와 대비되는, 한없이 작아진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작고 연약한 부분을 숨기려 작은 자신의 '작은 방'에 들어가는 인물들이 나온다. 드라마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나의 경험과 드라마가 교차했던 그 지점을, 주인공 '미지'를 중심으로 '서울'과 '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남겨보려고 한다.
감상 포인트
(※스포일러 포함)
#1. 서울 → 방
드라마는 쌍둥이인 '미지(박보영役)'와 '미래(박보영役)'가 주인공이다. 미래는 서울에서 한국금융공사에 다니고 있고, 미지는 두손리라는 마을에서 각종 잡 심부름을 하며 지낸다. 미지는 과거 고등학생일 때에 육상 유망주였으나, 부상을 입고 꿈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미지는 꿈이 좌절되어 자신이 쓸모가 없는 인간이라 믿으며 자신의 방에서 약 1년 간 나오지 않게 된다.
미지를 결국 방에서 나오게 한 것은 할머니인데, 꿈이 좌절되어 도망치는 미지에게, 도망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 아니고, 살기위해 하는 행동이라고 일깨운다 ('4화. 천적'에서). 병으로 쓰러진 할머니는 미지에게 서로 하루씩 버티며 살아가기로 약속한다. 미지는 그렇게 '방을 열고 나와'서 '하루하루 살아갈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이 된다.
회사의 여러 사정으로 인해 위험에 빠진 미래를 돕기위해 미지가 대신 서울생활을 시작한다. 미지가 서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예전에 미지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 문을 닫고' 사는 사람들 투성이다. 심지어 고등학교 동창이자,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인 '호수(박진영役)'마저 그렇다. 약한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 조차 감당하기 힘든 짐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 각자의 사정과 생각에 따라 그들은 마음 문을 닫고 사는 것이다.
특히, 드라마에서 메인 스토리를 이끄는 '공사'에서의 일은 공의로운 행동들이 오히려 인물들의 삶에 족쇄를 채워놓았던 사건들로 인해 발생한다. 본인들의 검은 이익을 위해, 재판에서 승소하기 위해,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저지른 모든 일들이 그들을 비유적으로 (혹은 말그대로) '방안에 갇히도록' 만든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지만, 모두가 '자신의 방'안에서 살고 있다.
#2. 방 → 마음
수많은 인물들 중, 드라마는 왜 미지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이는 미지만이 온전히 '방에서 나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못할 어려움에 무방비로 노출된 미래에게 선뜻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김로사'와 같은 인물의 마음의 문도 열 수 있었다. 물론 미숙함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잠시 닫게 할 때도 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낼 때에 마음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한다 ('3화. 똑똑, 문 좀 열어주세요'에서). 어찌보면 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미지는 용기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할 때가 많은 것 같다. 특히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약점을 함께 짊어지게 하기 싫은 마음을 가진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농담이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가 '회피형 인간들의 끊임없는 눈치싸움(...)'이 이어지는 것과 같이 보일 때가 많았다. '아니...! 그냥 말하면 되는데 왜 솔직하지 못해서 일을 저 지경까지...!'와 같은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니, 서로가 각자 자신의 삶을 막힘없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적어도 다른 이들은 보잘것없는 나 보다는 더 잘 살아내는 것 같다. 1화로 다시 돌아가보면, 미지도 처음엔 미래를 그렇게 이해했던 것 같다. 두손리에 있는 나보다 더 좋은 직장, 서울에 살고 있는 미래니까. 어머니조차도 나를 없는 존재 취급하고 미래만 자랑하니까. 하지만 미래는 오직 미지 앞에서만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미지가 그에 반응하며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미지가 미래의 방 문을 열고 마음을 본 것이다.
#3. 마음 → 마음
미지가 이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힘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미지에게 그랬듯이, 닫힌 문 앞에서 자신이 항상 함께 있음을 계속 알리는 것임을 보인다. 기꺼이 상대의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겠다는 의지를 지녔고, 그들의 닫힌 문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자신의 약한 모습 또한 보일 수 있음은, 미지도 그 방에서 갇혔었으나 기다림과 사랑이 있었고, 그에 부응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미지의 진심이 호수와 미래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이들 또한 누군가의 닫힌 방을 두드린다. 호수는 불편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사랑으로 재정의하고, 자신의 어려움을 미지에게 솔직히 표현한다. 미래 또한 자신을 도와주었던 '수연'에게 미지와 같은 방식으로 다가가게 되어 문을 활짝 열게 한다. 호수는 이런 마음을 '이상한 하나'로 표현한다.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를 채워주며 새로운 형태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Sion - On Your Side (미지의 서울 OST)
- 에필로그 : 연기와 연출
이야기 밖 이야기를 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하는데... 일단, 연기가 정말 대단했다.... 이번 드라마는 특히 몰입하며 시청해서 그런가? 미래와 미지가 서로 다른 인물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싶지만, 어떤 다른 1인 다역 작품보다도 서로 다른 사람 같았달까. 특히나, 서로가 서로의 삶을 연기하는 상황이기에, 서로가 서로인 척 하는 것 조차도 표현이 너무 섬세했다. ('미래인 척 하는 미지' 연기와 진짜 '미래'연기가 다른 것처럼)
연출 및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도 좋았다. 이야기 중간중간, 소위 '떡밥'을 뿌리는 것과 회수하는 것도 영리했고, 드라마의 주제와도 닿아있다. '닫힌 문'이라는 표현과 그 문을 여는 과정, 서로를 사랑하기에 서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 뿐이 아니라는 점 등등, 생각해볼만한 요소가 많다. 특히 각 화의 마지막에 인물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연출이 굉장히 인상깊었고, 각 인물들도 그저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인물이 없다는 점도 좋았다.
다만 비중분배가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어떤 인물들은 과하게 조명받고 어떤 인물은 서사의 비중이 부족했다. 전자는 '김로사' 혹은 '현상월', 후자는 '한세진'이었다. 특히, 한세진과 미래의 관계에 대해서 약간 묘사가 부족한 것 같아 아쉬웠다. 한세진이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처럼 보였거든. 한세진은 서울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미래를 단번에 알아본다. 서울과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서로의 약함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드라마였다.
총평
한줄평 : 불안도 희망도 함께하는 '이상한 하나'에 대해
별점 : ★ ★ ★ ★